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스스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1917년(1세)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파평. 아명은 해환(海煥).당시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월 28일에는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다(아명은 韓範, 부친 宋昌義, 모친 尹信永).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 유학중이었다.
1924년(8세)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태어나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및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태어나다.
1928년(12세)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송몽규는 『어린이』를 정기구독. 그들이 다 읽은 후 동리아이들이 빌려서 읽음. 명동에 공산주의 만연.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다.
1929년(13세)
4월,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갔다가 9월에는 중국 행정당국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수용되다. 외삼촌 김약연 평양 장로교 신학교 입학.
1930년(14세)
김약연 1년 수학 후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 부임. 명동에 공산테러 성행.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송몽규, 김정우 외 1명과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시 「초한대」(12. 24),「삶과 죽음」(12. 24)「내일은 없다」(12. 24)
1935년(19세)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술가락」이 아명 <宋韓範>이란 이름으로 당선.
4월, 송몽규, 학업 중단하고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러 중국으로 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들어가다.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시 「거리에서」(1. 18), 「空想」(『 崇實活泉』 10월), 「蒼空」(10. 20), 「南쪽 하늘」(10)
동시 「조개껍질」(12)
1936년(20세)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송몽규가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
9월 14일에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된 후 계속 요시찰인으로 감시당하다.
동시 「고향집」(1. 6), 「병아리」(1. 6)(『카톨릭 소년』 11월호 발표), 「오줌싸개지도」(『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 발표), 「기왓장내외」
시 「비둘기」(2. 10), 「離別」(3. 20), 「食券」(3. 20) 「牧丹峰에서」(3. 24), 「黃昏」(3. 25), 「가슴 1」(3. 25), 「종달새」(3), 「山上」(5), 「午後의 球場」(5), 「이런 날」(6. 10), 「양지쪽」(6. 26), 「山林」(6. 26), 「닭」(봄), 「가슴 2」(7. 24), 「꿈은 깨어지고」(7. 27), 「谷間」(여름), 「빨래」.
동시 「빗자루」「햇비」「비행기」
시 「가을밤」(10. 23)
동시 「굴뚝」(가을), 「무얼 먹고 사나」(10)(『카톨릭소년』 1937년 3월호 발표), 「봄」(10), 「참새」(12), 「개」, 「편지」, 「버선본」(12월초), 「눈」(12),「사과」, 「눈」, 「닭」
시 「아침」
동시 「겨울」(겨울), 「호주머니」(1936년 12월호, 또는 1937년 1월호 발표)
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발표할 때 <尹童柱>란 필명 사용.
1937년(21세)
4월, 졸업반인 5학년으로 진급.
송몽규는 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 재개.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로 수학여행.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되다.
시 「黃昏이 바다가 되어」(1)
동시 「거짓부리」(『카톨릭 소년』 10월호 발표), 「둘 다」, 「반딧불」
시 「밤」(3)
동시 「할아버지」(3. 10), 「만돌이」, 「나무」
시 「장」(봄), 「달밤」(4. 15), 「風景」(5. 29), 「寒暖計」(7.1), 「그女子」(7. 26), 「소낙비」(8. 9), 「悲哀」(8. 18), 「瞑想」(8. 20), 「바다」(9), 「山峽의午後」(9), 「毘盧峰」(9), 「窓」(10), 「遺言」(10. 24)(『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 23일자 발표)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시 「새로운 길」(5. 10)(학우회지『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비오는 밤」(6. 11), 「사랑의 殿堂」(6. 19), 「異蹟」(6. 19), 「아우의 印象畵」(9. 15)(『조선일보』 학생란 발표. 1939년 추정), 「코스모스」(9. 20), 「슬픈 族屬」(9), 「고추밭」(10. 26)
동시 「햇빛 ·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산울림」(5)(『소년』 1939년 발표).
산문 「달을 쏘다」(10)(『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호 발표)
1939년(23세)
연전 문과 2학년으로 진급.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 시 「유언」(2. 16), 「아우의 인상화」(날짜 미상)를 윤동주(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날짜 미상)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문장』『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시 「달같이」(9), 「薇 병들어」(9), 「투르게네프의 언덕」(9), 「산골물」, 「自畵象」(9)(학우회지 『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少年」
1940년(24세)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고향 후배인 장덕순 연전 문과 입학. 같이 입학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주욱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를 쓰다.
시 「八福」(12월 추정), 「慰勞」(12. 3), 「病院」(12)
1941년(25세)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 시작.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
시 「무서운 時間」(2. 7), 「눈오는 地圖」(3. 12), 「太初의 아침」「또 太初의 아침」(5. 31), 「새벽이 올 때까지」(5), 「十字架」(5. 31), 「눈 감고 가다」(5. 31), 「못 자는 잠」「돌아와 보는 밤」(6), 「看板없는 거리」「바람이 불어」(6. 2), 「또다른 故鄕」(9), 「길」(9. 30), 「별헤는 밤」(11. 5), 「序詩」(11. 20), 「肝」(11. 29)
산문 「終始」
1942년(26세)
연전 졸업 후 일본에 갈 때까지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 일본 유학 권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 졸업증명서, 도항증명서 등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3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 2일에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宋村夢奎>라고 창씨한 이름으로 도일하여 4월 1일에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다가 동북제국대학 편입을 목표로 급히 도일. 그러나 동북제대로 가지 않고 10월 1일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에서 하숙생활.
시 「懺悔錄」(1. 24), 「흰 그림자」(4. 14), 「흐르는 거리」(5. 12), 「사랑스런 追憶」(5. 13), 「쉽게 씌어진 詩」(6. 3), 「봄」<연대미상작품>
산문 「별똥 떨어진 데」「花園에 꽃이 핀다」
1943년(27세)
1월, 경도에 와서 맞은 첫 겨울방학에서 귀성하지 않고 경도에 남다.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면회간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그가 쓴 우리말 작품과 글들을 일역(日譯)하고 있는 것을 목격.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2 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1 형사부는 송몽규에서 <징역2년>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7일, 출감예정일: 1946년 4월 12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해서,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부친 송창희와 육촌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가져다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
봄이 되자 송몽규 가에서 <靑年文士宋夢奎之墓>란 비석을 해서 세웠고, 잇달아 윤동주 가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란 비석을 세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국이 해방되다.
1947년
2월 13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되다.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되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5월, 5 · 10 제헌국회의원 선거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거
1955년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되다. 이 증보판 시집부터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되었다. 그들이 납북인사 내지 좌익인사라는 혐의를 받는 걸 꺼린 것이다. 냉전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하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되었다.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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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서거 60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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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과 다른 표현 570개, 창씨개명 후 탄생한 ‘참회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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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어린 참회와 서정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안겨준 시인. 이역의 차디찬 감옥에서 2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독립운동가. 그러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윤동주와 그의 시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지난 2월16일은 윤동주의 60주기였다. 그의 유일한 혈육과 뜻있는 학자들이 60년 만에 다시 그려낸 시인의 ‘문학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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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나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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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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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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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우스개는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허리를 부여잡곤 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고향에 오면 두부를 만들어서 먹이시곤 했는데, 오빠랑 나를 데리고 콩을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드셨다.
한참동안 말없이 맷돌질을 하던 오빠가 “어서 오세요” 하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서 “오빠, 누가 왔어?” 하고 물으면 “아니, 그냥 심심해서”라고 대답한다. 할머니께선 “요 녀석이 또 할미를 놀렸구나” 하시며 웃으시곤 했다.
오빠의 싱거운 우스개는 그가 쓴 여러 편의 동시에도 나온다. ‘만돌이’ 같은 동시에 오빠의 장난기가 잘 배어 있다. 오빠의 시를 읽어보면 오빠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빠는 과묵하긴 했지만 사진 속의 모습처럼 늘 심각한 건 아니었다. 딱 한 번 아주 심각한 오빠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연희전문을 지원하면서 의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때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문과에 가는 것보다 의대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다. 그때 오빠가 밥까지 굶어가면서 문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오빠가 문과로 가게 됐다.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도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지낸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 보니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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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한민족 역사 문화 연구원
김정오원장님방
윤동주 시는 이렇게 해서 14넉 전 중국인에게 알려졌다
김정오 한민족역사문화원장 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오오무라 마쓰오의 윤동주 묘 확인 내용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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