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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6

Uncle Lee 2006. 10. 22. 16:26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2) 시를 논리적으로 구체화하기


가) 잘된 시

흔히 시평의 자리에서 논리성이란 말을 쓰면 대다수의 시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시가 논문이냐는 반발들을 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는 시어와 시어, 행과 행의, 연과 연의 전체와 부분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어도 시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성이란 시어의 유기적 관련과 짜임(구성)의 체계화, 상징이나 비유의 타당성, 내용과 정서의 필연성을 아우르는 포괄적 언어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시 쓰기는 시인들의 목표이며 시평의 대상이 되는 시의 구조면이기도 하다.

에즈라 파운드는 시를 형성하는 언어에는 운율적 요소, 영상적 요소, 논리적 요소의 세가지가 있다고 했다. 이 세 가지 중 운율과 영상적 요소는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고 있으나 논리적 요소에서는 우리의 시들이 등한한 것이 사실이다. 운율적(음악적)요소 만을 중요시한다면 음악을 따를 수 없고, 영상적 요소는 미술을 따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논리적 요소가 시의 맛을 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한다. 음악과 회화의 요소에 논리적 요소가 덧보태질 수 있다면 읽을 맛 나는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구상 시인은 우리 한국시가 이 논리적 요소에 등한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의 한국시의 이미지란 거의가 저 시각적(감각적) 심상에 머물러 있다 하겠고, 이지적 정신의 소산이 논리적 심상에 자각적으로 나아가는 시인이 드물다 하겠으 며, 그래서 아마 논리적 심상이란 용어부터 낯설게 들릴 것이다.

이런 논리적 완벽함에 도달한 시들은 우리들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주며, 이러한 시들은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자연스레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는 것이다.. "시는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 T.S. 엘리어트는 시의 이와 같은 논리적 심상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에 보이는 <제망매가>는 삶과 죽음의 괴리감을 한 가지에 난 나뭇잎과 낙엽으로 파악하고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피어나는 잎새로, 죽음을 낙엽으로 배치한 비유의 완벽함과 논리적 계산이 개입되어 있다.

생사로  삶과 죽음의 길은

예 이샤매 저히고 여기 있으므로 두려워하고

나  가 다 말ㅅ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몯다 닏고 가 닛고. 못 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이른   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딜 닙다이 여기에 저기에 떨어지는 잎처럼

?  가재 나고 한 가지에 나고

가논 곧 모 온뎌.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으 미타찰에 맛보올 내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 닷가 기드리고다.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제망매가, 월명사, 삼국유사, 양주동 향가 역)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론 님: 사랑하는 사람)

(황진이,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역)

어디 한 군데 허투루 쓴 게 없다. 그러면서도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다.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 수식도 없다. 다만 <제망매가>에서는 단순하면서도 뛰어난 직유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에서는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 이미지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읽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도록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고도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밤이란 시간을 의인화하여 여성 자신의 육체로 공간화한 그 절묘하고 고도한 수법은 얼마나 지적이며 기술적인가?" 고 감탄하면서 고도의 계산된 시의 구조와 시어의 표상을 강조한다. 구상 시인은 장 곡토(1889-1963)의 <직업의 비밀>이란 글에서 '시인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흔히들 시를 부정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큰 오해인 것이다." 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시가 가지는 다양한 이미지와 개인의 경험 세계가 쉬이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지 엉터리 시는 아니다. 이러한 시를 이해할 때 시의 논리성에 준하여 감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1981년 중앙일보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 역 대합실에는 막차를 기다리는 몇 사람이 톱밥난로를 쬐고 있다. 대합실을 감싸고 있는 벽의 유리창에는 돌아가며 난로의 불꽃이 조그맣게 비친다. 기다림의 지루함 속에 자꾸 내다보이는 철로 변 마른 수숫대에도 눈이 내린다. 난로 주위에 모여 동질감을 느끼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 중의 어떤 이는 쿨룩거린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난로에 던진다. 불은 조금 반짝이고 따스한 열기는 주위의 사람들을 저마다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간다. 불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불의 자극이었을까? 시린 손들을 난로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어밀면서 저마다 고향에 가지고 갈 사과 광주리며 굴비 한 두릅을 매만지면서 조용히 머잖아 올 기차를 기다린다. 담배를 피우고, 기침을 쿨룩거리는 사람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싸륵싸륵 내린다. 소리가 들린다. 눈꽃들의 화음. 그 정겨움. 자정이 넘으면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낯설음을 허물고 서로의 뼛속에 밴 아픔을 공감한다. 간이역에는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열차의 차창이 붉은 단풍잎처럼 창 밖을 스친다. 지나가는 열차 속의 얼굴들도 각자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또 다른 나를 보듯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면서 한 줌의 애틋한 정을 난로 속에 보탠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이런 이야기다.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 시에서 버릴 것은 없다. 버릴 것이 없다는 얘기는 논리적으로도 합당하다는 얘기다. 바꾸어 말하면 시상과 시어, 그리고 표현이 함께 어우러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어느 것을 빼거나 보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의 배경이 되는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공간이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이 사평역을 만든 것이다. 인근 나주군에 남평역이 있을 뿐이다. 상상력의 위력과 문학적 진실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아직 논리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했다. 그래서 위의 시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분석해 보는 것도 이해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 막차는 왜 오지 않느냐?---막차를 타려는 사람은 찻시간 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온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2)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은 어떤 것이냐?---꺽지 않은 수수꽃이 유리창에 비친 것(?) 만약 수수꽃다리를 말한다면 없어도 좋을 시행이기도 하다.

3) 그믐처럼 왜 졸까?---그믐은 심리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정리되는 시간이기에 지쳐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4) 한줌의 톱밥을 왜 난로 속에 던질까?---그리움을 더 오래 간직하고 떠올리기 위해.

5) 청색의 손바닥을 적셔두고는 어떤 것일까?---겨울날의 차갑게 언 손을 미미한 온기에 쪼이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묘사

6) 왜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각자의 삶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상상과 상념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느라. 바슐라르는 불은 상상력을 일깨우는 원소로 보고 있다.

7) 왜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하는 걸까?---그리움과 서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

8) 낯설음도 뼈아픔도 자정이 지나면 설원인 이유는? ---삶의 고단함도 시간이 지나면 눈이 덮여 하얘지듯 표백되고 정화되므로.

9) 왜 이름을 부르며 한줌의 눈물을 던질까?---그리운 삶의 애틋한 시간들을 하나씩 불러내며 떠올리기 위하여.

등등의 질문과 답변이 타당성 있게 성립된다면 시어의 적확한 사용, 상황의 필연성, 솔직한 정서 표현 등이 갖추어 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위 시에서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의 구절에서 희고 보랏빛으로도 보이는 수수꽃이란 뜻일텐데 수수꽃이 눈오는 겨울날에 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못일까? 확인할 수 없다.

곽재구 시인의 시들 속에는 패랭이꽃, 감자꽃, 진달래 등등의 꽃들이 상당히 많이 언급되지만 시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의미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수수꽃'은 플랫홈 철로가에 아직 남은 수숫대 위의 수숫대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수수꽃이 유리창에 난로의 불빛과 함께 오버랩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를 유리창에 낀 성애의 모양이 마치 수수꽃 같았기 때문이라면 흰 보라의 색채가 어울리지 않게 된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는 비교적 잘 짜여진 시로 읽힌다. 물론 시에서 완벽이란 없다. 그저 모든 시는 완전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황동규 시인은 이 <사평역에서>를 뽑고 난 소감으로 "허황됨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를 다루는 기량과 삶에 대한 끈끈한 진실도 보여주고 있다." 고 했다. 즉, 눈에 보이는 사실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이며, 그 속에 삶의 진실이 배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시가 된 것이다.

시의 논리적 구체성은 시를 쓰는 순간에는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감정(정서)의 표현이기에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솔직함과 진정한 마음의 표출이기에 체계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체계적이지 못한 솔직함이 언어화의 과정을 거칠 때는 언어적 질서와 감정의 적확한 표현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다양한 모습과 이미지로 촉발된 정서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곧 언어화의 과정이며 창작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쓸 때 모든 걸 다 계산하고, 논리적이면서 필연적인 인과성 위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함과 진정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는 자연스럽게 질서와 논리성을 담아내게 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황진이의 시조와 월명의 <제망매가>에서 맛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함과 진지함이 없을 때, 시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 정약용은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묻은 잔재를 씻어 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 고 하였다. (이어령, <문장대백과사전>) 먼저 사람이 되라는 얘긴데 사람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니 그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한 시쓰기일 것 같다. 춘원 이광수도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조국산천 기행을 쓴 그의 시는 소설이나 역사보다 한참 아래다.
출처 : 너에게로 가는카페
글쓴이 : 인간문화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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